'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
10월 20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제2동상 건립
11월 5일
국립묘지 제2유공자묘지에 안장
6월 12일
고당조만식선생 기념관 건립
12월 7일
어린이대공원에 고당 조만식 선생 동상을 건립 제막
8월 15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여
6월 10일
북한공산측에서 김상용, 이주하와 교환 석방 제의
6.25 이후 생사 모연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
11월 27일
가족 월남
1월 2일
신탁통치 반대운동 전개
1월 5일
소련군정 및 김일성의 조선공산당과 결렬됨으로써 이날 밤으로 소군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 1실에 연금. 얼마 후부터 행방불명이 됨
1월 6일
친위대 무장해제
8월 15일
민족해방을 맞이하여 17일에 평양에 귀환
건국준비위원회를 창립, 위원장에 추대됨
8월 28일 좌파와의 연립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수립에 따라 위원장에 피선
11월 3일
조선민주당 창립, 그 당수로 추대. 부당수에 이윤영, 최용건
4월
평양 경찰서에 연행되어 관여 모임의 해산을 강요받음
6월
중순, 동우회 사건으로 검거 선풍이 일자 서울에 압송되어 20여일만에 석방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묘수보회를 창립하고 그 회장에 취임
6월 15일
제 8대 조선일보사장 취임
5월 16일
신간회 해체에 즈음하여 백선행기념관에서 그 해체를 반대하는 연설을 함
7월
만보산 사건의 사태 수습에 평양에서 앞장 섬. 이 무렵 평양에 인정도서관 건립
국민 체력 향상을 위해 평양에서 관서체육회 회장으로 선출
4월 30일
숭인상업학교로 정신 인가를 받아 교장에 취임
2월 15일
민족단일전선 신간회 창립 때 동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
9월
일제의 교장 인가 반대로 숭인중학교장 사임
가을, 오산학교교장을 사임하고 평양 숭인중학교장 봉직. 이 해 평양에 백선행기념관 설립
오산학교 교장 재취임
3월
연정회 조직에 관여하는 한편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운동에 적극참여, 이상재 , 한용운, 송진우, 현상윤 제씨와 동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 이 해부터 평양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어 김동원, 오윤선 장로와 함께 평양의 3장로가 됨
4월
오산학교장 허가가 일제에 의하여 보류되자 평양에 돌아와 평양 YMCA 총무에 취임
1월
가석방으로 출옥
8월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 창립. 회장에 추대됨
9월
상경하여 경성형무소에 투옥된 3.1운동의 민족대표이자 오산학교 교주인 남강 선생 면회. 가을 정주에 돌아와 오산학교에 다시 부임
'조선의 간디' 고당 조만식
2월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3.1만세운동의 지방 주동자로 활약
3월 3일
강서 모락장 만세운동에서 관여함
3월 4일
중대 사명을 띠고 도인권씨와 상해로 향하던 중 평남 강동군 열패에서 일헌 보조원에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투옥됨
5월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
3월
명치대학 전문부 법학과 졸업
4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부임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의 동경 조선인 교회를 백남훈씨 등과 함께 설립
동경 조선 YMCA 이사장
3월
평양중학교 졸업
4월
일본 동경에 유학. 정칙영어학교 수학
평양 숭실중학교 입학
3월 13일
노일전쟁을 만나 일가족이 대동강 중류지방 베기섬으로 옮겨 피난생활.
신상호 소년과 가까이 지냄 그 무렵 한정교를 통하여 기독교 신자가 되고, 이때부터 곧 금주단연을 하게 됨
포목상·지물상 상업에 종사함(~1904)
(~1896) 평양 관후리 서당에서 장정봉 선생으로부터 김동원·한정교 등과 한문 수학
2월 1일(음력 1882.12.24)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창녕조씨 경학씨의 외아들로 출생
어머니는 경주김씨 경건여사. 누이로 보패, 누이동생에 은식 여사가 있었음